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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꿈꾸었던 사랑이 깨진 순간,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씁쓸한 환멸뿐.

일생 하나뿐인 사랑이라 믿었다.
영원히 함께할 단 하나의 운명이라 믿었다.
그랬기에
그 모든 것이 치밀한 계략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꿈꿔왔던 서현과의 결혼은 이미 지혁에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했다.
마침내 이 모든 사기극을 끝낼 때가 되자 냉정하게 이혼을 통고하는 지혁,
서현은 담담히 단 한 가지를 요구하는데…….

현지원
goldgold77@hanmail.net

여전한 떡볶이 마니아.
웃음이 좋고 행복한 기운이 늘 주변에 감돌기를 소망하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의 소유자.
사랑의 뜻을 소중하게 여기며 그 감동을 글로 표현해보고자 노력 중.

기출간작
『연인』
『애수』
『비인』
『후애』
『물망초』
『재회』
『천일화』
『그의 그녀』
『청실홍실』
『애원』
『계약커플』
『계약신부』
『흔적』

“내가 만약…… 거부한다면요? 꼭…… 그래야만 해요?”

결혼식 날 입었던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연상시킬 만큼 맑은 눈빛과 청아한 목소리였다. 이번에도 자신의 순진함이 통할 것이라고 믿는 서현의 뻔뻔하리만큼 낯짝 두꺼운 요구에 지혁은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자신을 내치지 말아달라고,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는 서현의 우회적인 간절함에 그는 냉소로 일갈했다.

“죽은 노인네까지 팔 생각은 없지만 그렇게 되면 셋이서 한번 제대로 흙탕물 속을 뒹구는 거지.”

심장이 멎을 만큼 차갑고 잔혹한 목소리였다. 그녀 따윈 이제 안중에도 없으며 결코 용서치 않겠다는 의지가 박힌 그의 말에 서현은 힘없이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기다란 속눈썹을 방패 삼아 연막을 친 후 흔들리는 눈빛을 재빨리 감추며 절망하는 그녀에게 조롱의 눈빛이 날아들었다. 위기에 처한 동물이 보호색을 띠듯 그렇게 자신의 죄책감을 은폐하는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속인 것도 모자라 날 상대로 협상을 하려고 해? 하긴 그 지독한 노친네와 의기투합해서 계략을 꾸밀 정도였으니 보통내기는 아니지. 잘도 날 속였겠다, 한서현!
지혁의 가슴 속에서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 어떻게 감히 네가 날 속일 생각을 했냐며 서현의 목을 당장이라도 비틀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처음으로 마음을 준 여자였다. 여자 때문에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며 비웃음으로 일관하던 그가 처음으로 잠을 설치게 만든 여자였다. 처음으로 마음의 휴식을 찾았다고 생각하게 만든 여자였고 평생 곁에 두고 지켜줄 것이라 다짐했던 여자였다. 그를 웃게도, 화나게도 하고, 노심초사하게 만든 저 여자가 말이다!
그러나 결국은 치밀하게 가장한 가면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드디어 내 것, 온전히 마음을 기댈 나만의 것이 생겼다는 기쁨도 잠시, 결국 그는 또 혼자였다. 분노의 끝자락은 결국 소태처럼 쓴맛과 씁쓸한 웃음이라는 사실과 함께.
그는 더 이상 사람을 믿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도 신뢰하지 않는다. 저 따위 계집애에게 끌려 속수무책 감당 못 했던 스스로에게 경멸과 조의를 표하는 바였다.
지혁이 관절이 도드라질 만큼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녀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충격과 허탈함이 새삼 떠오른 탓이었다.

“그동안 날 완벽하게 속여왔다고 믿은 소감이 어때? 노인네와의 계약으로 뭘 보장받았는지 모르겠지만 계약서는 필히 작성했어야 할 거야. 노인네 변덕이 워낙 심해서 문서로 받아두지 않으면 뒤통수 맞기에 그만이거든.”

지혁이 비웃음을 입에 문 채 이죽거렸다. 민 회장과 그녀가 맺은 약속에 대해 그가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포문을 열었다. 그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마음은 지독하게 차분했다. 그렇다고 해서 썩 내키는 것은 아니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한때는 목숨과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여자에게 당한 배신을 제 입으로 언급한다는 자체가 즐거울 리 만무했다. 그저 그녀의 속마음이 궁금할 따름이었다.
안 변호사를 통해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이혼을 요구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그녀의 표정이 어떠했을지, 그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진실을 알게 되었는지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갖가지 추측을 해대며 추론했을 광경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다소 억울할 뿐이었다.
서현과 민 회장이 그를 속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가 받았던 충격에 비하면 파헤쳐진 진실들이 그녀에게는 아주 짧은, 혹은 사소한 사건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본디 상처란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오래도록 남는 법이었고 부부 사이에는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본인의 입으로 수백 번도 더 강조했던 그녀가 아무런 변명도 늘어놓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 건 처음부터……. 난 그냥…… 그래요. 당신 뜻대로…… 할게요.”

지혁이 짙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 예상이 빗나간 상실감이 짧게 머물고 갔다. 유치하고 비열하게도 그는 서현이 보여줄 극단적인 반응을 기대하던 참이었다.
그가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 표정을 지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미소로 맞서던 그녀였기에 이번엔 어떤 가증을 떨며 변명을 늘어놓을지 자못 궁금했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역시 그보다 그녀가 한 수 위였다. 그는 자신이 가진 패를 숨기지 않고 낱낱이 공개하는 스타일인 반면 그녀는 절대 자신이 가진 패를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는 절대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 치밀함까지 갖춘 그녀의 내공은 실로 대단했다. 누군가 인형을 사준다고 하면 주저 없이 따라갈 것처럼 순진하게 생긴 생김새와 달리 그녀는 영악하고 교활했다.
바닥을 향해 고정되어 있던 서현의 시선이 천천히 탁자로 향했다.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단숨에 먹이를 낚아채가는 독수리처럼 지혁의 눈길도 함께 움직였다. 어느 날 신분이 급상승한 귀부인에서 하루아침에 남루한 신세로 돌아가는 것을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흥밋거리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우고 집중해도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저 담담하게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얼굴로 물끄러미 탁자 위의 서류를 쳐다볼 뿐이었다. 지켜보는 것이 지루할 정도로 그녀는 무채색 표정만 짓고 있었다.
끝내 지혁이 아드득 이를 갈았다. 칼자루를 쥐고 휘두르는 쪽은 분명 그이건만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다. 승리는 승리였지만 상처뿐인 승리였다. 유린당하고 난도질당하는 쪽은 그녀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꼭 패배자 같았다.
모르는 이들이 봤다면 서현 쪽에서 이혼을 청구한 거라고 생각할 만큼 그녀는 평소의 온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잃지 않았다. 그에게 구차한 동정심을 유발하지도 않았고 질척하게도 굴지 않았다. 그것이 더 지혁을 분노케 했다.

“어차피 너와 한편인 안 변호사가 작성한 것이니 딱히 빠진 내용이나 불만족스러운 사항은 없을 거야. 그렇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꼼꼼하게 살펴보도록 해.”

퉁명스럽게 내뱉는 지혁의 말에 서현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숱이 풍성한 속눈썹 사이로 그와 서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에게 청혼을 받던 날 그녀가 보여준 ‘왜 하필 나와?’라고 묻던 눈과 똑같이 천진함과 의구심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목소리가 그때처럼 떨린 탓이었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거침없이 그녀를 몰아치던 그도 그날만큼은 긴장으로 떨었다. 아마도 그녀는 지금 그의 목소리가 그때처럼 흔들리고 있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이내 자신의 착각이라고 수긍한 듯 그녀의 눈빛이 바뀌기는 했지만 지혁은 자신의 목소리가 지금만큼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호소하는 듯한 눈빛을 외면하며 그는 스스로를 좀 더 모질게 독려했다.

“궁금하다거나 요구사항이 있다면 지금 이야기하는 게 좋을 거야. 도장 찍고 난 후에 후회해봐야 소용없을 테니.”

서현의 아픔과 상관없이 지혁은 최후통첩을 했다. 조금 전 흔들렸던 목소리를 무마라도 하려는 듯 그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최근 들어 가장 밝은 얼굴이었다. 명치끝에 걸린 체증이 단박에 씻겨 내려간 것처럼 홀가분한 그 모습에 서현은 적잖이 상처를 받은 모양이었다. 울컥 슬픔 덩어리가 치밀어 오른 듯,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잊은 듯 그녀의 얼굴에 서운한 빛이 서렸다. 그나마 그것이 그를 위로해주었다.
다른 누군가의 행복에 대해서는 알 바 아니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겪어왔던 외로움을 다른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자신하던 그였기에 그녀만큼은 지켜주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라 확신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친 짓이었지만 그땐 그랬다.
그랬기에 그녀가 더더욱 용서되지 않았고 그만큼 민 회장에 대한 분노도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든든한 지원군이자 아군인 민 회장의 부재가 서현을 끈 떨어진 연 만큼이나 초라하게 만들고 있는 지금, 그녀가 누구보다 민 회장을 그리워할 거라는 점은 애써 짐작할 필요조차 없었다.

“없어요. 궁금한 거. 요구사항 같은 것도…….”

서현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지혁이 더는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몇 년간 이를 갈며 기다려 온 결말치곤 시시했지만 어차피 이 정도로 끝날 수밖에 없는 복수였다.
그가 의자의 팔걸이에 걸쳐둔 손에 힘을 주며 일어서려는 기색을 보이자 서현이 배우처럼 소스라치게 흠칫거렸다. 그의 행동이 잔인하기라도 하다는 듯 읍소하는 그 동작이 그에겐 연극처럼 꾸며진 동작으로밖에는 안 보였다. 수백여 일 넘게 부부로 살아왔던 시간 동안 그녀가 보여준 연기의 집대성과도 같은 함축적인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아무런 추억도 의미도 없는 몸짓에 불과했다. 오히려 한시바삐 벗어나고프게 만들 정도였다.

“잠깐만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지혁이 멈칫하며 동작을 멈추었다.

“나는…… 나는……. 그동안…… 참…… 고마웠어요.”

이건 또…….
예상을 뒤엎은 서현의 고해성사 같은 고백에 지혁은 순간 당황했다. 한서현이라는 이름으로 산 세월보다 민지혁의 처라는 호칭으로 불린 지난 2년이 훨씬 행복했다고 말하고 싶은 듯 애처로움이 가득한 물기 어린 목소리였다. 그것이 본심이라고 하소연하듯 희고 고운 손을 어찌해야 할지 주체하지 못하며 그녀는 촉촉하게 젖은 눈을 내리깔고는 그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 나처럼 행복한 남자는 없을 거야. 결혼해달라고 하니 군말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