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자신으로 인해 피아니스트 윤이성의 이미지가 망가지자

그가 더 나락으로 떨어질까 두려워진 제영.

“나 춥다고. 안아 줘.”

“지금 안고 있잖아.”

“……안아 달라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마음을 확인한 그 밤.

제영은 결국 이성의 곁을 떠나 타국으로 향한다.

남겨진 이성은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껍데기만 남은 채 피아노 연주를 이어 나간다.

곡 표절 사태로 앙심을 품은 교수가

콘서트 장에 난입해 이성에게 큰 부상을 입히고

그 소식을 제영도 전해 듣는다.

불안한 마음과 숨길 수 없는 애정에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가지만 엇갈리는데…….

바다뱀자리

[3권]

“말 잘 듣겠다며.”

-응.

“사고 안 치겠다며. 목줄 매서 나한테 쥐여 줬다며.”

-……응.

“윤이성 이미지에 어울리지도 않는 뮤즈 발언은 또 뭔데.”

-잘못했다고…….

잘못했다고 비는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서럽고 억울한 것도 없지 않은 모양인지 흐리게 퉁명스러운 기색도 있었다. 꼭 같은 일로 여러 번 혼난 아이를 다시 다그치는 기분이었다.

제영이 삐져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그러고 나니 남은 감정이란 이성을 향한 미안함이었다. 미안함이라기보다는 불안감이었다.

여기서 끝날까? 사람들이 금세 다시 박희은을 잊고 나면 윤이성은 다시 빛이 날까. 어쩐지 멋쩍고 수줍어서 전하지 못한 말이 있는데, 윤이성 당신은 내가 하고 싶은 연주를, 그 이상을 내게 들려줬거든.

그 고마움을 전하지도 못했는데. 나도 어쩌면 같은 마음으로 너를 보고 있다고 말하고도 싶었던 것 같은데. 지금보다 윤이성이 나에게 소중해지면, 그때는 나는 또 너를 영영 잃지는 않을까.

“생각해 보니까…….”

지금보다 더 무서운 방법으로.

“윤이성이 또 그렇게 잘못한 건 아닌 것 같아. 미쳐 날뛰기는 했어도.”

-나 요즘은 얌전히 있었다?

“알아.”

-알면, 나 이제 매일 전화해도 돼?

“이제 잘못했다고는 안 해도 돼.”

전화 너머로 이성이 벌떡 일어나다가, 발이라도 헛디뎠는지 쿵 하고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허둥지둥거리는 소리가 고스란히 다 들려왔다. 그렇게까지 되도록 얼마나 놀란 건지, 이성은 악 소리 한 번을 안 냈다.

-잘못한 거 아니니까 매일 전화해도 된다는 거지? 맞지?

“너는……. 넌 그게 중요해?”

-아니 씨발, 좋아하는 여자 목소리 듣는 게 중요하지 그럼 뭐가 중요해? 아, 맞다. 씨발은 취소!

“못 살겠다, 진짜…….”

-못 살면 안 되지. 나랑 잘 살아야지.

“너 때문에 못 살겠다고.”

-그래? 내가 뭐 또 잘못했냐? 아, 다 모르겠고 그냥 박제영 얼굴 보고 싶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화가 이어졌다. 퍽 오래 연락이 오가지 않았던 사이인 것도 없었던 일처럼. 하긴 3년 만에 다시 봤을 때도 그랬다. 윤이성의 미친 짓 때문에 악을 쓰고 화를 섞기는 했어도, 그저 어제 만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서로를 대했던 것도 같다.

-만나러 가도 되냐?

“되겠니?”

-안 되나……. 아니 왜?

“몰라서 물으세요, 어린애 뒤꽁무니나 졸졸 쫓아다니는 변태 되신 피아니스트 윤이성 씨?”

제영의 말에 이성이 잠시 침묵했다. 어째 좀 당황한 것도 같았다.

-봤냐?

“떠드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어떻게 모르겠어.”

-그거는, 그거는 두면 다 금방 괜찮아져. 내가 존나 기막힌 연주 보여 주면 저 새끼 원래 저런 피아니스트였지 하고 넘어간다고.

“무슨 자신감이세요?”

-실력 있는 놈의 자신감.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시라고요. 일 다 끝나면 나도 뭐, 대표가 알아서 뭐 해 줄 것 같던데?

“……그래.”

왜 조용한가 했더니. 이성이 한 말에서 제영이 이유를 찾았다. 일부러 내버려 두는 거였다. 흐르는 상황이 박제영한테 유용하니까. 때늦을 때까지 두었다가 모든 게 정리가 되면 그제야 수습에 나서려고.

앞으로도 윤이성의 곁에 박희은의 이름이 있으면 내내 이런 식일까. 그러다간 언젠가는 이름, 명성, 실력 말고 다른 것도 잡아먹히지 않을까.

-나 그냥 지금 만나러 가면 안 되냐? 진짜?

가라앉아 가는 제영의 마음과는 달리, 이성이 해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영이 단호하게 답했다.

“안 돼. 기다려.”

-뭘 또 기다려! 이러다 박제영 마음 또 바뀌어서, 어? 야! 너 다시 빌어! 이러면 나만 좆, 아니 새 되는 거 아냐!

“기다려. 날이 추워.”

-춥기는 개뿔, 4월이다. 꽃이 피다 못해 지게 생겼는데 뭐가 춥냐?

제영이 이성의 빈정거림에 그저 웃었다. 이성은 그렇게나마 제영의 웃음을 들은 게 좋은 건지 저 혼자 ‘어, 씨발 웃었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저도 따라 웃었다.

“내가 갈게.”

-온다고? 지금?

“아니. 지금 말고. 일 다 마치면.”

제영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겨울 한기에 얼어붙어 동상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붉고 푸르렀다.

“그러면, 내가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