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피아니스트 윤이성.

자신을 대한민국 최고 피아니스트 자리에 올려 두고

사라진 제영을 3년 만에 찾았다.

-내 스폰서를 찾습니다.

교정에 울려 퍼진 충격적인 발언과 함께 그들은 재회한다.

그리고 이성은 제영에게 그보다 더 쇼킹한,

그러나 제영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내던지는데…….

“나랑 한 번 만날 때마다 공연 한 번.

그리고 키스는……

그래. 앨범 낼 때나 특별한 부탁이 있을 때가 좋겠다.

대신, 네가 나한테 먼저 하는 거야.”

3년 전과 같게, 혹은 다르게.

두 사람은 다시 스폰서와 후원받는 피아니스트 사이가 되지만

제영을 오래도록 좋아한 형찬이 등장하며 파란이 이는데.

[2권]

스폰서와 피후원자 관계가 안정적으로 이어지며

제영의 곁을 차지한 이성은 피아니스트의 본분을 다한다.

그러나 제영이 작곡 과제로 제출한 곡을

교수에게 도둑맞은 사실을 알게 되며 이성은 분노하고

생방송에서 모든 사실을 까발리는데.

“네가 뭔데 내 일에 피아니스트 인생을 걸어?”

“내가 뭔지 진짜 몰라서 묻냐?

너 존나게 좋아하는 새끼잖아.”

자신의 일에 모든 것을 건 이성에게 분노한 제영과

그녀가 무언가를 포기하는 일이 미치게 싫은 이성.

두 사람은 크게 다투며 냉전 상태가 되고,

그사이 이성은 어떻게든 제영이 작곡한 곡을

되찾기 위해 움직이는데.

바다뱀자리

[1권]

익숙한, 제영에게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파를 타고 전해지는 저 빌어먹을 목소리는 분명.

-피아니스트 윤이성입니다.

주변은 3년 만에 듣는 윤이성의 목소리에 웅성거림을 키웠다. 누구는 윤이성의 목소리가 맞는 것 같다고 하고, 누구는 몰래카메라 아니냐며 요즘 교내 방송 한번 희한하게 한답시고 비웃어 댔다.

-내 스폰서를 찾습니다.

그러나, 이 한마디에 일순 모든 소란이 그쳤다. 그저 의아함을 느낄 따름이었던 제영의 감정이 이제는 불안으로 바뀌었다. 뭔가 사건이 터질 듯했다.

그녀가 숟가락을 놓았다.

-작곡과 3학년 박제영. ……내 앞에서 토껴 놓고 음악은 또 하고 있었지? 빌어먹을.

“푸흡!”

신나게 씹어 댄 밥알이 제영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혼자 밥을 먹고 있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무도 그녀가 뱉은 밥알에 얻어맞지는 않아서.

다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지나치게 혼자 당황하다 먹던 밥을 뱉어 냈으니 말이다. 그것으로 모자라 지금은 옆자리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챙겨 메고 잽싸게 일어나 달려 나가기까지 했다.

완전히 내가 박제영입네 광고하는 꼴이었다.

-아무튼, 박제영. 내 스폰서. 지금 여기로 안 오면 내가 잡으러 간다?

빌어먹을 윤이성이 3년 만에 나타났다. 제영은 정신없는 머릿속을 애써 정리하며 이를 악물고 캠퍼스를 내달렸다.

교내 방송에 난입했다는 건 당연히 본관 건물에 있는 방송실에 쳐들어갔다는 뜻이다. 저 빌어먹을 주둥아리가 엿 같은 말을 더 뱉어 내기 전에 빨리 뛰어야 했다.

사람들은 점심시간의 한가운데라 여유롭게 걷거나, 아니면 이성의 폭탄 발언에 멈춰 수군거렸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오직 제영만이 미친 듯이 달음박질했다.

-시간은……. 그래도 몇 살이라도 많은 내가 너그러워야지. 10분 준다.

“저 개자식 진짜!”

평소엔 감정이 없다시피 차분한 제영이 그녀답지 않게 상소리를 내뱉었다. 여전히 미친 듯이 달렸다. 이성은 미친 소리를 잘도 뱉어 놓고 차분하게 원래의 DJ에게 상냥하게 마이크를 넘겼다.

스폰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영은 9년 전, 그러니까 고작 열세 살이었을 때 윤이성을 찾아내 후원했다. 후원자를 영어로는 스폰서라고 하니까 그래, 영 틀린 말은 아니지.

다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스폰서’라는 단어의 이미지를 이성이 모르지 않을 텐데. 이건 숫제 엿 먹어 보라고 대놓고 강타를 날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막노동과 아르바이트나 전전하던 놈을 대한민국 사람 대다수가 아는 일약 스타 피아니스트로 만들어 줬다. 그랬으면 고마워할 일이지. 어떻게 3년씩이나 그 아까운 재주를 썩혀 가며 잠적했다가 이렇게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후원자를 엿 먹이러 친히 나타나실 수 있단 말인가.

“허억, 후읍, 헉!”

미친 듯이 달렸다. 달린 끝에 제영이 본관 건물에 도착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눈앞의 계단을 올려다보며 제영이 다시금 빠르게 발을 놀렸다.

1층, 2층, 3층.

계단을 올라 코너만 돌면 바로 방송실이었다. 제영이 막 코너로 돌진할 때였다. 별안간 그녀의 손목이 쭉 뻗어 온 남자의 손에 붙잡혔다.

“악!”

끌어당기는 힘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간 제영이 지끈거리는 손목의 통증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단숨에 엄청나던 남자의 아귀힘이 빠져나갔다. 쉽게 접하기 어려운 길쭉한 그림자가 제영의 머리통을 덮었다. 제영이 고개를 쭉 들어 올렸다. 눈빛은 더없이 이글거렸다.

그러나 험악하기 짝이 없는 제영의 표정과는 반대로 몹시 상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얼굴로 이성이 해맑게 웃었다.

“오랜만이다?”

“그러게. 오랜만이네.”

제영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이성은 언제 웃었냐는 듯 싸늘한 눈으로 제영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제영이 이성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2권]

손가락이 망가져 피아니스트라는 미래를 도둑맞았던 것처럼, 그래도 꽤 믿고 있던 교수에게 저의 감성을 도둑맞았다.

망가진 손가락이 도둑맞은 멜로디를 그려 냈다. 톡, 토독. 건반을 두드리지 못하는 손가락이 뽑아내는 건 그저 조금 엇나간 박자뿐이었다.

그런 제영의 뒤로, 본디 새벽잠이 얕은 이성이 조용히 다가섰다. 그는 제게 주어진 방 문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제영을 가만히 응시했다.

연주가 멈췄다.

“잠이 안 와?”

“잤어. 자다 깼어.”

잠이 오지 않는 거냐며 묻는 이성의 목소리야말로 수면의 나른함이 한 톨도 묻어나지 않았다. 제영의 목소리는 어설프게 잠에서 깬 사람 특유의 먹먹하게 가라앉은 느낌이 가득했고 말이다.

이성이 낮게 웃었다. 문가에 등을 대고 있던 이성이 똑바로 서서 느릿한 걸음으로 제영에게 다가갔다.

“전엔 잘만 자던데.”

“……뭐?”

뒤에서 슬그머니 안아 오는 이성의 스킨십에 멈칫하기도 잠시, 제영이 어딘가 짓궂은 이성의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전에 언제?”

“글쎄. 언제 얘기일까.”

이성이 의뭉스레 답을 뭉갠 덕에 제영은 오히려 그가 언제를 말하는지 깨달았다. 물러가다 만 잠기운과 사색에 젖어 멍하던 제영의 눈에 돌연 날이 섰다. 제영이 이성의 품 안에서 몸을 돌려 선명해진 시선으로 그를 쏘아봤다.

“너 집에 갈래?”

제영의 말에 이성이 그녀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었다. 두 손을 들어 양 귀에 붙이고 말했다.

“항복.”

“허?”

“항복했다고. 손 풀었잖아. 그러니까 집에 가라고 하지 마라.”

장난스러운 웃음, 낮은 목소리. 새벽에 듣기에 이성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는 지나치게 위험했다. 입가에 걸린 미소는 개구쟁이 아이처럼 풋풋한데, 목소리는 지나쳤다.

콩콩, 제영의 심장이 속도를 올린 메트로놈처럼 똑딱거렸다. 이성은 제영의 긴장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제영의 옆으로 반쯤 빙글 돌아서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심야 연주회 어때?”

여전한 미소를 입에 머금은 채로, 이성이 유혹이라도 하듯 말을 던졌다. 그의 손가락이 제영의 피아노 건반을 제 것처럼 두드렸다.

하나, 둘, 셋.

누르는 건반의 개수도 하나 둘 셋. 늘어나며 화음을 이루는 단 세 개의 음이 이성의 손가락에서 시작되어 제영의 귀에 달콤하게 감겼다.

제영이 입을 꾹 닫고,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이 입가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금세 진지한 기세를 품으며 그가 건반 위에 다시 손을 올려놓았다.

연주가 시작되었다.

윤이성이 처음 연주했던 박제영의 습작, 열여섯 마디 과제 곡이었다.

이성의 애드리브까지 붙어도 연주는 짧았다. 하지만 그뿐으로 충분했다. 말을 나누지 않아도 윤이성의 위로는 박제영에게 닿았고, 그녀 또한 굳이 고마움을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나는 너를 알고 있어.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누구도 너를 빼앗을 수 없어.

그 단호한 의지가 담긴 연주는 제영의 나약하게 부서진 마음의 틈을 채웠다. 어쩌면 임시방편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건반에서 손을 내려놓은 이성의 시선이 제영에게 닿았다. 윤이성의 눈은 바깥에서 쏟아지는 흐린 가로등과 달빛만을 담고도 반짝였다. 그 나머지를 채우는 빛은 오로지 제영을 향하는 그의 마음이었다.

제영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키스할래?”

이성은 진지한 낯을 지우고 금세 아이처럼 맑게 웃었다. 그의 퇴폐미 어린 얼굴과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제영은 눈을 감았고, 이성의 입술은 자연스레 제영의 입술을 찾아 맞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