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환장하는 사랑이 뭔지 알기도 전에

남자 친구의 바람으로 배신부터 배운 서해민.

헤어진 다음 날, 예상치 못했던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데.

“선배가 먼저 나한테 키스했잖아요. 그것도 기억 안 나요?”

“뭐? 내가?”

“뭐야. 나한테 사귀어 달라고 울고불고 매달린 것도 기억 못 하겠네.”

3주 동안 사귀었던 도한의 친구이자 교내의 유명 인사, 고한결.

장난인지, 진심인지 도통 알 수 없는 그의 모습에

해민 또한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하는데.

“그래서 받아 줄 거예요, 말 거예요? 두 번이나 깔 정도로 내가 싫어?”

“……싫다면?”

“좆같이 어색한 상태로 다시 저 차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거지.”

결핍된 마음에 채워 넣을 수 있는 무언가를

이번에는 찾아낼 수 있을까?

또다른

출간작

『두 번째 청혼은 달콤하게』

『낙하산은 남편이 필요해』

『방구석 멜로디』

『우리의 밤은 찬란하고』

한국대 경영관 402호 강의실 두 번째 줄 창가 자리. 매주 화요일, 서해민이 하루를 시작하는 곳이었다. 교내 카페에서 테이크아웃 해 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지난 강의 내용을 복습하고 있노라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찌는 듯한 더위가 한풀 꺾였다.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가 시작된 지 어언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창 너머 울긋불긋하게 물든 가을 풍경에 잠시 넋을 놓았을 때였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무리의 대화 소리가 귓등을 두드렸다.

“이도한이랑 사귄다고? 언제부터?”

이도한? 볼펜을 딸깍거리던 해민의 손이 멈칫했다. 기분 나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쉿! 조용히 좀 해. 아직 얼마 안 됐어. 엊그제 학회 회식 끝나고 도한이가 데려다준다길래 같이 집에 가다가…….”

해민이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그들을 바라봤다. 서너 명의 무리 속에서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힌 윤소희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흠칫 놀란 소희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존재감을 숨기고 있던 해민이 대뜸 돌아본 탓에 그녀도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아…… 시끄럽게 해서 죄송해요.”

멋쩍게 웃으며 사과를 건네는 소희에게 해민은 딱딱하게 굳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색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황급히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민의 붉은 입술 사이로 허탈한 웃음이 샜다. 겉옷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 액정을 두드려 메신저 앱을 켰다. 이도한이 보내온 메시지는 사흘 전이 마지막이었다. 엄지로 화면을 밀어 올리며 그동안 오갔던 메시지를 천천히 곱씹었다.

[누나. 밥 먹었어요? 아직이면 새로 생긴 고깃집 가 볼래요?]

[먹었어.]

[그럼 이따 영화 볼래요? 심야 영화 어때요?]

[다음에. 오늘 안에 끝내야 하는 과제가 있어서.]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다음에는 꼭 같이 밥 먹고 영화 봐요.]

3주간 매일 나눈 대화는 대부분 그런 식이었다. 도한이 먼저 제안하고 해민은 상황에 따라 수락하거나 거절하거나. 학교와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카페에서 과제를 한 적도 더러 있었다.

[고백받아 줘서 고마워요. 누나랑 사귄다는 게 진짜 꿈같아요. 아직도 안 믿겨요.]

하트 바구니를 쏟아붓는 곰돌이 이모티콘과 함께 보내온 이도한의 메시지. 정확히 3주 전부터 시작된 관계였다.

도한은 지난 학기 내내 해민에게 열렬한 구애를 해 왔다.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지나치게 부담스러워하는 해민을 배려해 학교 밖으로 종종 그녀를 불러냈다. 학생회에 들어가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도 해민의 끼니를 걱정하고, 작은 선물을 들고 매일 밤 해민의 집 앞에 찾아와 얼굴을 붉혔다.

모른 척하려고 해도 모른 척할 수 없는 정성이었고 진심이었다. 아니, 진심인 줄 알았다.

‘제가 누나 좋아하는 거 다 알고 있잖아요. 나중에, 누나도 저를 좋아한다는 확신이 들면 정식으로 고백하려고 했는데 이대로 있다간 영영 못 할 거 같아서요.’

늦은 밤, 도한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찾아왔었다. 그런 도한을 보며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랑 만나 주면 안 돼요? 사귀어요, 우리.’

고개를 푹 떨군 채로 중얼거린 그의 고백에 그래, 라고 대답한 건 연민에서 비롯한 충동이었다.

회상에 잠겨 있던 해민은 작게 혀를 찼다. 손가락을 놀려 도한과의 대화 창을 흔적도 없이 삭제했다. 괜한 시간 낭비였다. 이런 식으로 마침표를 찍게 될 줄 알았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텐데.

교수님이 등장하고 휴대폰을 다시 겉옷 주머니에 넣으려는 순간, 짧은 진동이 울렸다.

[수업 끝나고 잠깐 얘기 좀 해요.]

오늘 아침, 평화로운 고요를 깨뜨린 이도한. 이름 석 자가 화면에 떠올라 있었다.

* * *

“누나, 미안해요. 진작 얘기했어야 하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가 않아서.”

경영관 7층에서 옥상으로 올라가는 비상계단에는 교수 연구동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가 있었다. 학생들이 여기까지 올라올 일은 거의 없었고, 교수들이야 대부분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기에 인적이 드문 장소였다. 가끔씩 도한이 해민에게 커피나 각종 간식거리를 건네주기 위해 불러내는 곳이기도 했다.

해민은 도한의 옆에 나란히 서서 난간에 팔을 걸쳤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이 미니어처처럼 자그맣게 보였다.

“저 윤소희랑 만나기로 했어요.”

군 전역 후 2학년으로 복학한 이도한과 현재 4학년 재학 중인 윤소희는 동갑일 터였다. 재수해서 입학한 데다가 1년 동안 어학연수를 다녀와 4학년으로 복학한 해민과는 두 살의 터울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이 계산이나 하고 있는 제 자신이 마냥 우스웠다.

“저도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저번에 학회 애들이랑 술 마신다고 나간 자리에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도한은 해민에게 고백했던 그때처럼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한 해민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랬구나.”

“그게 그러니까…….”

“잘됐네.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