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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1년만 부부인 척해 줘.”
“……무슨 소리야?”
“너 사채 빚이 꽤 많던데. 그거 전부 내가 갚아 줄게.”
은하가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는 듯한
그의 자신만만한 표정은 10년 전 고등학생 때와 똑같았다.
“하루에 100만 원이야.”
“…….”
“빚 전부 청산하고 거기다가 3억 6500만 원이면 꽤 괜찮지?”
하는 일이라곤 시훈의 퇴근을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그를 기다리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게 정말 행복한 건가?’
가망 없는 짝사랑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끈질기게 따라붙는 그의 시선을 무시했다.
“최은하. 네가 갈 곳이 어디 있어.”
“……고등학생 때나 지금이나 도와줘서 고마워. 시훈아.”
생각보다 그리 구질구질하지 않은 이별이었다.
시훈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님도르신
“안녕.”
“앉아.”
인사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시훈이 짧게 말했다. 은하가 머뭇거리면서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자, 음식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먹어 보는 코스 요리의 맛이 어떤지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모든 것이 익숙해 보이는 시훈과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은하의 차이가 더욱 극명하게 느껴지기만 했으니까.
두 번째 접시가 나오자마자 시훈은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아깝다는 듯 바로 본론을 꺼냈다.
“선 자리가 끔찍할 정도로 많이 들어와.”
“…….”
“차라리 결혼을 하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은하는 뜻 모를 그의 말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결혼한다고 알려 주려고 그녀를 여기까지 불렀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
“……곤란하겠네.”
겨우 할 말을 찾아낸 그녀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래. 곤란하지. 그러니까 네가 나랑 1년만 부부인 척해 줘.”
“뭐?”
갑작스러운 말에 은하가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부부인 척해 달라고?’
결혼을 하자는 소리인가? 1년만이면 나중에 이혼을 하자는 건가. 왜 자신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걸까.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뒤엉켰다. 시훈의 생각을 이해할 수도, 읽어 낼 수도 없었다.
“무, 무슨 소리야.”
더듬더듬 되물었지만 시훈은 자세한 사정 설명 대신 돈 얘기를 먼저 꺼냈다.
“알아보니까 너 사채 빚이 꽤 많던데. 그거 전부 내가 갚아 줄게.”
“…….”
“그리고 결혼식 하는 그 순간부터, 하루 일당 100만 원씩 쳐 주고.”
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자, 더욱 유혹적인 제안을 덧붙였다. 그는 은하가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눈치였다. 자신만만한 표정은 고등학생 때와 똑같았으니까.
“네가 잠만 자면서 하루를 보내도, 밥을 먹는 그 순간에도, 숨만 쉬고 있어도 하루에 100만 원이야. 1년을 꼬박 채우면 3억 6500만 원. 사채 빚 전부 청산하고 거기다가 3억 6500만 원이면 꽤 괜찮은 장사지?”
멀거니 시훈을 쳐다보던 그녀는 그가 도련님과 하녀 소리를 듣던 고등학생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히 혼인 신고 같은 걸 했다간 이혼할 때 귀찮아지니까. 혼인 신고는 나중에 하겠다고 둘러댈 거니 서류상으로는 깨끗할 거야. 그리고…….”
은하는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시훈은 그녀의 침묵이 긍정의 표시라고 생각했는지, 조금 기분이 좋아 보이기도 했다.
‘거절해야 돼.’
고등학생 때 뼈저리게 깨닫지 않았던가. 돈으로 얽힌 관계의 끝이 좋지 않았다고.
하지만 은하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러기엔 그녀의 현실이 너무 지옥 같았으니까.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끔찍한 지옥에 처박혀 있던 은하에게 시훈의 제안은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한 것이었다. 몸에 좋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결국 입에 넣게 되는 불량 식품처럼.
지금도 그때와 똑같았다. 처음으로 시훈이 그녀에게 돈을 내밀었던 그때,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처럼 멋지게 그딴 돈 필요 없다고 외칠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은하는 포크를 꾹 움켜쥐었다. 그나마 당장 좋아도 대답하지 못하는 건, 밑바닥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자존심 때문인가. 아니면 고등학교의 기억 때문인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은하에게 시훈이 지갑에서 까만 카드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아. 물론 3억 6500에서 돈 쓰라고는 안 할 거야. 1년 다 채울 때까지 이 카드로 너 쓰고 싶은 대로 쓰고. 돈은 나중에 고스란히 통장에 넣어 줄게.”
은하는 새까만 카드를 멀거니 쳐다봤다. 돈 얘기 다음에 또 돈 얘기라니.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시훈은 여전히 그녀를 돈으로 부릴 수 있는 줄 알고 있었고, 빌어먹게도 그의 생각은 정확했다.
비참한 기분으로 천천히 손을 내밀어, 테이블 위에 놓인 카드를 집어 들었다.
“돈은 언제 입금해 줄 건데.”
은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까만 카드를 천천히 손끝으로 쓸었다.
“1년을 다 채우면 한 번에 지급하는 걸로. 어차피 평소엔 그 카드 쓸 거니까 상관없지?”
“……응.”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 상황에서 거절 한마디 못 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참담하면서도 이 상황에서도 시훈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는 것에 헛웃음이 나왔다.
은하는 손이 아프도록 카드를 꽉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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