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愛니스트.

이 전쟁 같던 삶이 완전히 위로 받은 기분처럼 그 사소한 한마디가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았다.
굉장히 뭉클할 정도로.
무언가 가슴 깊은 상처의 일면을 치유 받은 기분이었다.


“이게 더 어울리겠어요. 이 그림의 타이틀은. 진짜 피아노에 사랑이 마구 마구 담긴 것처럼 들렸거든요.”

아픔이 있지만 언제나 밝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그녀 이은애



남들의 찬사도, 인정도 다 필요 없던 그의 피아노 인생에 그녀가 던진 한마디는 커다란 빛으로 머리와 가슴을 관통했다.
강렬하게 아프고 미치도록 조여들었다.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고 조임을 반복하는 것 같았다.

“피아노를 치고 있는 건…… 사랑이 아니라 눈물이에요…….”

지독한 아픔의 세계에서 홀로 살아가는 그 레이 한태조


피愛니스트. 사랑을 담은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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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좋은 걸 어떡해. 그래도 보고 싶고…….
그 사람 점점 나아지고 있었어. 그 사람도 나 만나서 점점 삶이 안정되어가고 있었다고.
나 역시…… 나 역시 그 사람 만나고 나서 이제야 사는 맛이 좀 났었단 말이야.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 알잖아.
근데 나 그 사람 만나서 그래도 사는 맛은 있구나…….
아직 살아볼 만하구나…….

아침에 일어나는 게 즐겁고 출근하는 것도 너무 좋았어.
일 하러 간다는 생각보다 그 사람 보러 간다는 생각이 너무 행복했어.

“나도…… 행복을 느낄 수 있더라고, 엄마.”

그를 만나 삶의 힘겨움에서 행복을 찾은 여자 이은애.

없었다.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자신에게는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축복받지 못한 채 태어나, 외로이 살아가던 그때…… 내 유일한 안식처였어.
그런데…… 그것마저 사라지면 난…….
너 마저 잃을까…… 두려워.
모든 걸 얘기해 줄 테니…….
가지마라, 너.

내 삶의 전부는 여전히 피아노야.
그리고 그 피아노를 칠 수 있게 하는 사람이 바로 너고.

“피아노를 치고 있는 건…… 사랑이 아니라 눈물이에요…….”

그녀를 만나 괴로움에서 사랑을 찾은 남자 한태조.

피愛니스트.
사랑을 담은 피아니스트, 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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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지현(nojeehyun@hanmail.net)

출간작 : 그림자
e-book 출간예정작 : THE BEST

레이는 문득 어렸을 적이 떠올랐다. 그때를 떠올리니 어느새 레이의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그럴 때도 있었다는 생각이 이젠 추억을 느끼는 것처럼 마음이 포근했다. 정말 다행인 것은 그래도 좋은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과거가 있다는 것. 레이는 이제야 비로소 어린 시절의 즐거웠던 일을 떠올렸다.

모든 걸 다 버리고나니 차츰차츰 좋은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려졌다. 이젠 완벽히 벗어날 수 있을 거란 희망으로 레이는 묵혀두었던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 볼 참이었다. 그럴 수 있을 만큼 마음의 평화가 스며들고 있었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삶은 변했고, 흐르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은 흘러갔다. 레이는 마들렌과 은애가 떠나는 날을 마지막으로 홀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 모습은 은애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의 믿음이 있기에 슬퍼하지 않았다. 우린 분명히 웃으며 뜨겁게 다시 만날 것을 알고 있었다.

마들렌의 도움으로 은애와 연옥은 파리의 생활에 금세 익숙해졌다. 은애의 실력을 높이 산 마들렌은 적극적으로 그녀를 도와주었고 화재로 거동이 불편해진 마들렌은 연옥의 도움으로 그렇게 서로를 위하며 또 다른 가족을 만들어냈다. 늘 꿈꾸던 삶. 그 삶속에 머무르며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던 은애에게 어느 날 한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제목 : 피愛니스트

눈살을 굽힌 은애는 고개를 기울이며 서둘러 메일을 확인했다. 마우스를 딸칵 거리는 손끝에 긴장이 스며들었다. 그에게서 온 소식일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꿈만 같은 하루하루를 살면서도 가슴 한 편 그에 대한 그리움은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파리로 온 지 꼬박 1년이 되던 해였다.

잘 지낸다는, 잘 있냐는 안부조차 허락이 안 되었던 나날이었다. 하지만 은애는 아무 내용 없는 메일에 실망부터 들었다. 너무 기대했던 탓에 허망함까지 들었다. 하지만 곧 은애의 눈에 첨부 된 파일이 눈에 띄었다. 은애는 음악 파일 하나를 다운 받는 내내 다시 긴장이 들기 시작했다.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그 단순한 음계부터 들렸다. 은애는 고개를 기울이며 더욱 음악에 집중했다. 마치 그건 손을 풀기 위한 워밍업이었던 것처럼 곧이어 차분한 피아노 소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잠든 밤. 달빛을 빛 삼아 음표를 그려나가는 레이의 모습이 눈앞에 스쳐지나갔다.

이미 은애의 눈가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이건 누가 들어도 레이의 피아노였다. 그리고 그 음악이 오롯이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이라는 걸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아름답다 못해 처절한 선율이 이어갈수록 은애는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주르륵 흘렸다.
눈물을 흘리며 이 곡을 써내려갔을 레이.

처음, 이곡을 들었을 때 레이는 치우라며 악보를 던져버렸다. 그 악보를 치우지 못한 건 어쩌면 지금의 순간을 미리 예감한 건 아닐까. 은애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점점 새어나오는 울음소리를 참지 못한 채, 그대로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은애를 향한 레이의 마음이 그대로 묻어난 피愛니스트.

선율이 끝나고 나자 레이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렸다.

“타이틀…… 피愛니스트. 사랑을 담은 피아노.”
레이는 은애의 그림과 글귀가 쓰인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펜 하나에 온 열정을 담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을 은애의 눈빛을 생각하니 어제보다 더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지는 것 같았다.

“오늘도 그 그림 보고 계시네요?”
등 뒤로 다가온 간호사가 레이를 향해 아는 체를 했다. 레이는 짧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피아노 쳐주실 거죠?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레이는 간호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병원 로비엔 그를 위한 피아노 한 대가 있었다. 레이의 피아노는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을 주고 감동을 주며 평화를 나누어주었다. 손가락질을 받았던 그의 음악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조금씩 그의 주변은 레이와 함께 변화되고 있었다.

이렇게 피아노에 모든 감정을 녹아낼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은애를 향한 지독한 그리움이 빚어낸 전율이었다. 단 한 번도 레이는 은애를 잊은 적이 없었다. 행여, 각오했던 마음이 무너질까 연락 한 번 먼저 하지 않았지만 레이는 느낄 수 있었다. 은애의 마음은 변함없이 뜨겁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 기다림 끝에 자신을 꼭 찾아와 줄 그라는 걸 은애 역시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레이가 먼저 찾아올 때가지 은애는 변함없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피愛니스트의 선율이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기다려.

“기다릴게요…….”
은애와 레이의 마음은 그렇게 늘 하나였다.
은애에게 그 메일이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정말 뜻하지 않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어느 한 피아노곡이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 재소자가 세상에 알린 곡인데 그 곡은 다름 아닌 피愛니스트였다. 윤수는 은애에게 전해주지 못한 녹음기를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세상에 알리게 했다. 그리고 은애는 메일을 보내 준 사람이 레이가 아니라 윤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윤수는 뒤늦게야 은애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달한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이 세상에 알린 그 재소자는 피愛니스트를 들으며 정말 많은 눈물을 흘렸고 사실 그 음악을 들었을 때, 모든 게 잘못되어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레이의 그 곡은 삽시간에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곡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리고 그 작곡가는 어느 한 병원에서 매일 로비에 놓인 그랜드피아노를 치며 마음이 지친 이들에게 늘 아름다운 피아노를 선사해주고 있다고 한다는 소식에 레이를 실제로 보기 위해 찾아간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레이는 병원 사람들 외의 다른 사람들과는 모든 것을 차단하며 홀로 긴 싸움을 치루는 중이었다.

아직은 세상에 발을 내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몸을 숨겼지만 한 음악이 집중을 받다보니 레이의 다른 음악들도 덩달아 관심을 받게 되었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 음악가의 집안이란 말이 맞았던 것처럼 지금 세상 밖으로 빛을 보게 된 레이의 곡들은 사람들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으며 감동을 전해 주었다.
뒤늦게 그의 음악들이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종이 한 장에 앞뒤로 피愛니스트를 담은 은애와 레이의 작품은 서로를 이어주는데 가장 큰 역할이 되기도 했다. 사랑을 담은 피아노. 그리고 은애를 담은 레이. 시간이 흘러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유. 그것은 곧 마음으로 이어져 두 사람의 기나긴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