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그녀의 심장이었던 남자.
그가 비수를 들고 그녀에게 돌아왔다.

“……뭘 원해요?
혜리가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결론만 얻고서 어서 도망가고 싶었다.
그와 더 마주하고 있는 건 힘겨웠다.

“설혜리, 너.”

“우린 헤어졌어요. 남자와 여자가 사귀다가 헤어지는 건…… 흔한 일이잖아요.”

“너한테나 그랬겠지.”

“…….”

“나한테는 유일한 거였어.”

그에게 있어 절대적인 존재는 그녀뿐이었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 그가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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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혜은(아홉시)

쓰고싶은 글이 무지개처럼 다양한 여자

출간작
너에게 나를 주다
계약하다
오피스 로맨스

출간 예정작
시놉시스만 가득인 상태

“혹시 진민태라는 그 남자랑 아는 사이냐?”

차에 올라타자마자 설 회장이 멍하게 앉아있는 혜리를 향해 물었다.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가만히 바닥을 보고 있던 혜리는, 용케 그 말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렇다면 다행이고.”
설 회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꺼내는 말에 혜리가 고개를 반쯤 돌렸다. 무엇이 다행이냐 묻는 혜리의 얼굴을 보며 설 회장이 답답한지 넥타이를 풀며 대답했다.

“위험한 남자다.”

“…….”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위험해.”

시트에 몸을 파묻은 설 회장이 예리한 눈빛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처음 본 순간부터 설 회장은 직감했다. 위험한 남자라고. 진민태는 예의상 웃고 있었으나 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기분을 원하는 데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계약서를 바라보는 시선 하나로, 움직이는 눈빛 하나로, 입꼬리를 움직이는 각도대로 마주 선 사람을 긴장시켰다가 안도시켰다가 하는 그런 힘이었다. 약자의 입장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서 만났더라도, 그는 위험한 사람이었다.

“감사팀에 주의를 주거라. 쉽지 않은 싸움이 될게다.”

“아버지.”
혜리가 조용히 부르자 넥타이를 돌돌 말던 설 회장이 고개를 돌렸다. 혜리는 몇 시간 사이에 진이 다 빠진 듯 지친 표정으로 설 회장을 바라보았다.

“포기하는 건 어때요?”
혜리는 한 번도 아버지에게 먼저 무언가를 권한 적이 없었다. 그런 딸의 제안이 못마땅한 듯 설 회장의 얼굴이 단번에 날카로워졌다.

“무슨 말이냐.”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모르는 소리! 우리는 투자를 받는 것 자체가 이기는 거다. 어떻게든 버텨야한다. 다른 자금줄을 찾을 때까지, 우리가 놓친 계약들을 다시 회수할 때까지 버텨야해!”
아버지의 으름장에 혜리가 치맛자락을 거머쥐었다.

“더 위험한 일이 벌어질 거예요. 아버지도 진민태씨가 위험해 보인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계약을 파기해요. 투자금을 받기 전에 지금이라도 당장……!”

“계약은 사인한 직후부터 효력을 발휘한다. 마지막 조항 못 봤느냐?”
아버지의 질책 어린 목소리를 듣고서야 혜리는 마지막 조항을 떠올렸다.

‘계약은 사인한 직후부터 효력을 가지며, 협의가 아닌 일방적인 파기 시 투자금의 2배를 위약금으로 지불한다.’

위약금으로 400억. 현재로서는 단 50억조차도 힘겨워서 허덕거리는 판이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조항이었다.
혜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얀 이에 분홍빛 입술이 짓이겨져 뭉개졌다. 언제, 어디서나 허리를 굽히지 않아야한다는 제 신념 탓에 겨우 버티고 있지만 당장 죽을 것만 같았다.
창밖을 보던 설 회장이 이를 갈며 말했다.

“버텨라, 설혜리. 흔들리지 마라. 너는 적당히 있다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그동안 나는 쓰러지지 않는다. 내가 누군데, 내가 맨손으로 진성 단조를 세운 사람이야. 할 수 있어.”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리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혜리는 결국 눈을 질근 감았다.

* * *

TH 호텔 스위트룸.
거대한 원목 문이 성벽처럼 가로막고 있었다. 혜리는 그 문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핸드백에서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좀 더 진한 화장과 전과 다른 붉은 입술. 이곳에 오기 전 마치 이것이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줄 유일한 부적인 것처럼 혜리는 화장에 매달렸다. 그리고 그 화장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지만, 혜리는 입술에 립스틱을 좀 더 덧발랐다. 손거울을 핸드백에 챙겨 넣은 혜리는 벨을 눌렀다.

몇 번의 벨소리 후 문이 소리 없이 스르륵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와이셔츠 한 장을 입은 그가 비스듬히 기대서 있었다. 마치 그녀가 올 거라는 걸 진즉부터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라고 머무는 곳을 알려준 것이겠지만.

혜리는 울렁거리는 속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
그가 실내를 향해 고개를 까닥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실내를 바라보던 혜리는 섬뜩한 불안함을 느꼈다. 좀처럼 발을 움직이지 못하는 혜리를 그가 차갑게 바라보았다.

“아니면 여기서 이야기할 건가? 씻으러 갈 거라서 별로 시간은 없는데.”
그러면서 그는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하나 둘 단추가 풀릴 때마다 그 틈으로 잔근육이 잡힌 탄탄한 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들어갈게요.”
사람들이 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혜리가 스위트룸으로 성큼 발을 들였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시끄럽게 귀에 와 닿았다. 어색하게 문 입구에 선 그녀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간 그가 푹신한 소파에 앉아 그녀를 올려보았다.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닌가?”

“이 계약, 처음부터 당신 계획이었죠?”

“처음이라면 어디서부터 말하는 거지?”

“사호 기업이 갑작스럽게 우리 진성 단조에 투조할 리가 없어요. 대청 그룹이 대청 단조를 설립해서 우리 단조로 들어오는 계약을 가로챈 것부터, 모조리 전부 다 당신 계획이었죠?”

불안한 마음을 숨긴 혜리가 무심한 표정으로 위장해 말했다. 대청 그룹에서 갑작스럽게 대청단조를 설립해 진성 단조가 단독 계약하던 계약처를 모두 빼앗아갔다. 갑작스레 일감이 줄어든 진성 단조는 몇 달을 버티다가 지금과 같이 재정이 악화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기업의 횡포라 생각했던 것이 실은 뒤에서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던 것이었다.

그는 대답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걸어왔다. 혜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치 눈앞에서 거대한 파도가 들이닥치는 것처럼 위협적이고 불안했으나 대답을 듣기 전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혜리의 앞에 선 그가 손을 뻗었다. 동시에 눈을 질근 감은 혜리는 위로 동여 묶은 머리카락이 스르륵 풀리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어깨 너머까지 늘어진 머리카락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손에 그녀의 머리끈이 쥐어져 있었다.

“내가 이전부터 말했을 텐데.”

“…….”

“넌 머리 푸는 게 더 낫다고. 나한테 잘 보이려고 온 거면 그 정도는 기억 했어야지.”
그의 음산하고도 위협적인 목소리를 들으며 혜리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나 그 마음을 숨긴 채 도도하게 턱을 든 채 민태를 바라보았다.

“몇 년 전의 일이니 기억할 리가 없죠. 내가 만난 남자가 당신 하나 뿐도 아니었는데 그런 소소한 취향까지 일일이……. 윽.”

그녀가 대답하기가 무섭게 턱에서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의 턱을 거머쥔 그가 웃음기를 싹 거둔 건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갖은 애를 썼으나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혜리는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알던 진민태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고요하고 차분하며,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혐오했다. 더욱이 자신에게 단 한 번도 이렇게 힘을 쓴 적 없던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노골적으로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얼굴만 같은 다른 남자를 보는 느낌에 혜리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도발하지 마. 진성 단조 살리고 싶으면.”

“윽. 대체 왜 이래요!”
기어코 혜리가 솟구치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왜 이러는 지 니가 더 잘 알 텐데.”

“…….”

“나는 그 때 너에게 처음부터 말했어. 끝까지 갈 거 아니면 날 잡지 말라고. 그런 날 잡은 건 너야. 그러니 끝을 봐야지.”
그 이유만은 아니길 바랐다. 그 이유 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오는 내내 간절하게 바랐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그 때문이라 말했다. 마음이 시끄럽게 요동쳤다.
당장이라도 허물어져 내릴 것처럼 위태로운 표정을 지으며 혜리가 말했다.

“남자와 여자가 사귀다가 헤어지는 건…… 흔한 일이잖아요.”

“너한테나 그랬겠지.”

“…….”

“나한테는 유일한 거였어.”
그의 잠긴 목소리에 혜리의 목이 콱 잠겼다.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몇 년이 지나도 그녀가 잊지 못하는 몇 안 되는 목소리 중 하나. 시간에 희미해져가는 풍경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그녀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혀있던 그 목소리.

“……뭘 원해요?
혜리가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결론만 얻고서 어서 도망가고 싶었다. 그와 더 마주하고 있는 건 힘겨웠다.

“설혜리, 너.”

“우린 헤어졌어요.”

“그래. 헤어졌지. 그래서 오늘 다시 만나게 된 거지.”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나른하게 웃었다. 지친 표정으로 혜리가 입술을 달싹였다.

“정말 날 원해요?”

“어. 내가 부르면 와.”

“…….”

“벗으라면 벗고, 누우라면 누워. 벌리라면 벌리고.”

“…….”

“내가 질릴 때까지 니가 할 일은 그거 하나 뿐이야.”